다큐 ‘자연농’을 찍은 감독들이 농촌 대신 도시에 정착한 이유

오사카 기타카가야의 골목에서 폐품으로 악기를 만드는 워크숍을 진행하는 패트릭 라이든
https://youtu.be/7aSRU9o8aHE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큐 ‘자연농’을 작업한 강수희, 패트릭 커플. 그들의 다큐가 완성된 2015년부터 지금까지 생태와 농업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이는 다양한 곳에서 크고 작은 상영회가 열리고 있다. 이후 그들이 오사카의 한 마을에 예술 공간 ‘더 브랜치’를 열어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침 일본에 있던지라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농 커플이 정착한 동네에 도착해 구글 지도를 보며 끊임없이 걷다 골목이 좁아질 때쯤, 멀리서 들어오는 음악소리를 듣고 직감했다. 더 브랜치가 가까워졌음을.

사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자연농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책을 발표했다는 것. 그리고 오사카의 작은 마을, 기타카가야로 이주해 예술 공간 더 브랜치를 열었다는 것. 하지만 그 음악소리는 마법처럼 우리를 강력하게 잡아 당겼고, 그 소리가 시작되는 곳에서 마침내 수희 씨와 패트릭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오사카 기타카가야의 골목에서 폐품으로 악기를 만드는 워크숍을 진행하는 패트릭 라이든

흙, 돌, 풀… 자연으로 예술하며 사는 삶

이날 더 브랜치 밖에서는 폐품으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는 워크숍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안에서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자연농 커플이 더 브랜치라는 공간을 어떻게 꾸몄는지, 그리고 이 커플이 농사와 관련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과정을 기록한 전시였다.

이들이 목재로 실내를 정비하고, 천을 둘러 오래된 일본식 목조주택에 숨을 불어 넣은 과정을 글과 도면, 사진으로 소개했다.

전시에는 농사에 관련된 사진도 몇 컷 있었다.

수희 씨의 설명을 들어보니, 다큐 ‘자연농’을 찍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닌 이 커플이 2015년 ‘Real Time Food 세계에서 가장 느린 레스토랑(RTF)’이라는 프로젝트로 지금 살고 있는 기타카가야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

“(RTF프로젝트로) 처음에 주문을 받고, 받고 나서 심고, ‘두 달 후에 오세요’ 하고, 두 달 후에 사람들이 올 때까지 매주 워크숍을 연 거예요. 자연과 예술, 이런 것들을 같이 하는 텃밭에서 하는 워크숍을 두 달 동안 쭉 진행했어요. 그래서 이게 (이곳에서) 처음 했던 프로젝트고, 저희도 이걸 해보니까 되게 좋은 채널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했어요.”

내가 먹는 식재료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자연의 상호작용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상기시켜주는 일. 알면서도 잊고 사는 진리를 느리지만 사려 깊게 전달해주는 작업 이야기 삼매경에 푹 빠졌다.
식물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꽃과 잎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돌에 표정을 그려 넣는 워크숍도 이곳 기타카가야에서 이어나갈 예정이다. 수희 씨와 패트릭 씨는 더 브랜치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자리한 공터로 이끌었다.

“여기는 빈 땅이라 우리가 텃밭으로 쓰기로 했어요. 조약돌로 밭 계획을 일단 표시해 두었어요. 원래는 건물이 있던 땅이라 패트릭은 계속 토양 검사를 하자고 하고, 저는 굳이 그래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마침 텃밭이 필요했는데 좁지만, 건물 사이라도 볕이 잘 드는 곳에 밭을 쓸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자갈 뿐이던 빈땅은 금새 텃밭으로 자랐다. 자연농 커플이 서류 문제로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도 풀과 작물이 스스로 자라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생태 예술이 잘 어울리는 도시 마을
기타카가야

더 브랜치가 있는 기타카가야 마을의 골목길. 치시마 재단이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유지하며 마을을 활기차게 만드는 도시재생의 사례를 만들었다.

“자연농에서는 농사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농사를 어떻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더 가깝에 이해할 수 있나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어요.”

수희 씨와 패트릭 씨는 RTF 프로젝트 때 인연을 맺은 일본의 부동산 기업 ‘치시마 토지회사’와 ‘치시마 문화재단’의 후원으로 기타카가야에 임시 정착했다.

한때 조선업으로 잘 나갔던 기타카가야는 공장이 다른 부지로 이전하자 빈집과 건물이 늘어나며 고령화와 인구부족에 시달리는 마을이 된 것.

그때 이 마을에 뿌리를 둔 치시마 토지회사는 조선소의 오래된 사무실을 ‘크리에이티브 센터 오사카 (CCO)’로 개조해 모든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전용 시설을 마련했다.

예술 공간을 마련한 곳이니 그들이 머물 레시던시가 필요해 10년 전에 생긴 것이 ‘에어 오사카 호스텔’.

작가 뿐 아니라 이곳을 찾은 관광객에게도 열린 공간이다.

낡은 건물을 최소한만 보수해 건물이 지닌 분위기와 개성을 한껏 자아내는 에어 오사카가 생긴 이후, 기타카가야에는 빈 건물을 미술단체와 예술가들이 개조해 예술 마을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이후 치시마 토지 재단은 버려진 건물을 보수하고, 자연농 커플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안경가게 ‘카쿠레야 1635’

이곳에는 에어 오사카 뿐 아니라 안경가게 ‘카쿠레야 1635’ 같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골목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기타카가야의 마을지도

또, 다양한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가든 등 사람들이 모여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속속 자리잡고 있다.


도시재생은 이렇게

이제 한국에서도 건물을 부수고 짓기를 반복하는 전시행정은 점점 공감을 잃고 있다.

그 자리에 들어온 건 도시재생이라는 미명 아래 벽화를 덧칠하고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설을 만들거나 보수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공공 도서관인 Little Free Library

하지만 관이 주도해 일사천리로 길을 닦고 그럴싸한 포토존 하나 만드는 것만이 도시재생의 전부는 아니다.

만약 치시마 재단도 기타카가야에 크리에이티브 센터만 만들고 역할을 다 했다 여겼다면,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기타카가야가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주민들의 개성이 녹아나는 마을이 되기까지 단순히 치시마 재단의 시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치시마가 제공한 인프라에 마을의 역사와 공공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공들인다면, 마을을 새로운 시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 그 뒤에 다른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자꾸만 생겨난다는 것.

더 브랜치가 있는 기타카가야 마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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