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도 충분히 힙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산 맥주를 마실 때 선택지가 적었다. 한국에서 맥주가 두가지 브랜드로 대표되는 동안 맥주 맛을 비하하는 농담이 유행했고, 사람들은 조금씩 수입맥주로 관심을 돌렸다. 수입맥주는 수많은 ‘맥주덕후’를 움직였고, 다양한 맥주 양조장이 전국에 생기며  ‘맥주’의 맛과 이미지가 풍부해졌다.

일본에서는 사케가 그렇다. 지난 몇 십 년 이상 대형 제조사의 대량 생산설비에서 쏟아져 나와 매력을 잃고 외면 받게 된 존재. 그런데 이런 사케가 ‘프리미엄’으로 업그레이드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바람이 분지도 10년이 넘었다. 일본에서 ‘흥하는’ 사케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한국의 맥주시장과 많은 부분 상통한다. 20~30대 청년이 사케를 빚기 시작하면서 사케 맛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기 시작한 것. 이전의 사케들은 누룩향이 나거나 깔끔한 맛에 한정되어 있던 반면, 지금의 사케는 부드럽거나, 달콤하거나, 산미가 더 풍부하다. 나는 일본의 사케가 사랑받는 이유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었다.

마침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의 사케바 ‘오모테나시’의 김기삼 대표를 통해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사케를 제조하는 치요주조를 직접 가볼 수 있었다.


좋은 술은 물 부터 다르다

치요주조의 첫인상은 어두운 나무빛과 오래된 건물 냄새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탁하거나 매캐하지는 않은, 오랫동안 사람이 공을 들여 가꿔온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

이 양조장에서는 1873년부터 술을 빚어오기 시작해, 1969년 주인이 바뀌며 치요주조가 되었다.

치요주조는 사케의 발상지인 나라 분지의 남서부인 고세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많은 브랜드의 생수가 생산되는 곳이자, ‘미야미주’라는 생수의 고장이기도 했다.

치요주조의 대표 사카이 데쓰야 상은 이곳 마을 우물에서 긷은 ‘명수’를 대접하며 소개했다.

치요주조 대표 사카이 데쓰야 상

“우리 양조장이 산 속에 있다보니 바닷가에 있는 양조장 보다 미네랄의 양은 적은 편이에요. 미네랄 성분이 강하면 같이 어우러지는 맛이 나고, 물맛이 없으면 다른 재료에 대한 맛을 부각시키죠.”

사카이 상은 물 맛이 없는 편이라 소개 했지만 치요주조의 명수는 한국에서 마셔본 물보다 기름기가 느껴지는 번지르르한 맛이 났다.

“신기해, 물에서 맛이 느껴지네!”

“뭐랄까, 유질감이 있네요. 물이 오일리해요.”

‘맛이 없다’는 편견을 깨는 다양한 질감과 맛을 선사하는 명수를 마시고 각자 자신이 느낀 물 맛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나는 물을 마시고 나니 입 안에 얇은 막 같은 것이 씌워진 느낌이 났다.

오직 이 물만 필터한 뒤 술을 만드는 건 지금까지 지켜오는 치요주조만의 원칙이다.


장인과 마니아는 한 끗 차이

양조 과정을 설명하는 사카이 상. 가장 왼쪽이 취재를 도와준 오모테나시 김기삼 대표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사카이 상의 안내에 따라 본격적으로 술을 만드는 공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제일 먼저 선별기를 소개했는데, 깨진 쌀알을 하나하나 골라내는 것이 술 만들기의 시작이다.

“고시히카리 같은 품종은 이삭이 짧아요.벼 이삭이 중간부터 익는데 너무 익으면 앞 부분이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앞 부분이 푸른색일 때 추수해서 선별기를 통해 덜 익은 쌀알을 선별해 내죠.”

깨지지 않고 잘 익은 쌀은 정미기로 가는데, 한번에 1200kg까지 정미할 수 있는 기계에서는 쌀알 40%를 정미하는데 24시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기계가 정미할 때 쌀알이 크니까 처음에는 강하게 돌려도 되지만, 나중에 알이 작아질 수록 부서지기 쉬워서 약하게 돌려야 해요. 이때는 기계가 알아서 감지해 속도를 약하게 해요. 쌀을 부서지지 않게 원하는 만큼 남기는 것이 정미의 핵심이죠.”

사케의 원료가 되는 쌀포대가 품종별로 쌓여있다.

이렇게 골라내고, 깎여진 쌀은 어디로 갈까.

좋은 품질의 흰색 겨는 과자로 만들고, 돼지 사료로도 쓰기도 한단다.

와이너리 출신인 사카이 상은 자부심을 표했다.

도정 후 동그랗게 깎인 쌀을 소개하는 사카이 상

“와인은 버리는 것이 많지만 쌀은 전부 활용할 수 있어요. 여기서 술 쌀로 할 수 있는 것이 세가지예요. 하나는 이렇게 술로 만드는 것, 두번째는 쌀겨로 활용하는 것. 나머지는 술지개미를 활용하는 거예요. ‘가스지리(국요리)’나 장아찌같은 절임요리를 만드는 재료가 되죠. 쌀은 정말 친환경적인 재료예요.”

술이 담긴 수조가 있는 양조장의 내부

그 뒤에 물살의 압력으로 거품을 내어 쌀을 씻어서 불리고 찌는 것 까지 쌀의 정미율과 품종에 따라 디테일이 다른 매뉴얼이 있다.

치요주조의 대표인 사카이 상은 기계마다 어떤 기능이 있는지, 정미율에 따라 걸리는 시간과 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양조 과정에서 정확하고 균일한 데이터를 체크하는 것은 재료만큼 중요하다.

이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맞춰서 기계화하고, 늘 데이터를 근거로 조절하기 때문에 사케는 늘 균일하게 좋은 품질의 맛을 낸다.

찐쌀을 발효하는 과정

사카이 상은 익힌 쌀에 ‘효모’라 불리는 맥아균을 뿌려 몇 단계에 걸쳐 발효하는 방법으로 사케를 만든다.

찐 쌀을 발효시켜 누룩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 감미료에 버무린 쌀과자 맛이 났다.

발효 과정 중 균으로 코팅된 쌀을 맛보니 감미료를 뿌려놓은 과자같아서 배가 부를 때까지 얼마든지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카이 상의 권유로 치요주조의 사케 네 가지를 테이스팅 할 수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곳의 시그니처 사케인 ‘쿠지라’는 사카이 상이 직접 재배한 쌀을 쓸 만큼 열정을 보인다.

“일본은 도시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케에서 만큼은 ‘지역’으로 구분해요. 교토의 유일한 아쉬움은 사케를 생산해내는 능력이에요. 하지만 쌀의 생산 능력은 뛰어나죠. 몇가지 것들은 지역에서만 가능해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하죠.”

직접 재배하는 쌀 10%를 제외하고 훗카이도, 나라 현 등 여러 지역의 쌀을 사용하고 있다.

그가 쌀을 선정하는 기준은 오직 ‘품종과 질’로, 소규모로 제대로 키운 쌀만 고집한다.

양조장을 소개하는 내내 눈을 반짝거리며 한 가지라도 더 설명하려 애쓰는 그의 태도는 엄격한 장인보다는 이제 막 사케에 입문한 마니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30년 가까이 해온 일을 이제 막 입문 한 사람처럼 대하며 한결같이 아끼는 태도. 그것이 치요주조의 정신이자, 프리미엄 사케로 사랑받는 비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통이 현대를 살아가는 법

요즘 사케는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와인처럼 즐기는 것이 트렌드다.

쌀로 만들어진 술이라 어떤 라이프스타일이나 음식과도 조화롭게 잘 어울리는데, 사케마다 특별히 최고의 궁합을 이루는 음식이 따로 있다.

그래서 치요주조는 시그니처 사케와 동명인 사케바 쿠지라를 직영으로 운영하며 사케를 더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다.

그렇게 일본의 오래된 전통주 사케는, 일본인들이 지금 가장 잘 먹는 음식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소통한다.

치요주조 안에서 사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한국의 국악밴드 ‘씽씽’이 떠올렸다.

굳이 해외에서의 인기를 끌어오지 않아도 밴드 씽씽의 등장 이래로, 그저 계승자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국악을 많은 사람이 찾아 듣는 일이 벌어졌다.

세 명의 걸출한 소리꾼과 장영규라는 음악장인이 블루스를 가미해 편곡한  민요는 클럽에서 국악을 공연하는 진풍경을 만들었다. 살면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사케도 마찬가지다. 꼭 치요주조의 프리미엄 사케가 아니더라도 요즈음의 사케는 맛과 향, 라벨까지 2000년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의 취향을 저격하는 데 충분하다.

장점은 살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취향과 기술에 맞춰 보완해 만든 국악과 전통주.

외면받고 있던 전통도 충분히 ‘힙’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말한다.


※취재협조 및 감수 : 오모테나시 김기삼 대표
※취재협조 : 치요주조(千代酒造)
※통역 : 이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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