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을은 60대가, 다른 마을은 70대가 마을의 막내라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들려온 것도 오래. ‘시골’을 가슴에 품고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든 안다. 농촌에서 ‘어린 여자’로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사회가 명시한 청년은 만 39세까지라지만, 시골에서는 청년도, 40대도 여전히 젊거나 어린 여성이다. 전국 농촌에서 여성으로 살며 할말 많은 20대부터 40대를 살아가는 그녀들과 시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 내가 최근에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고향에 오니, ‘돈 잘 버는 남자 만나서 결혼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래야 하고 싶은 농사도 마음 편히 지을 수 있다고요. 제가 짓는 농사는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도시에서 살다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지을 계획을 세우는 ‘덕자’. 그는 농촌 사람들과 SNS로 관계맺고 소통을 자주 하는 편이다. 덕자는 자신의 SNS에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비혼을 생각하고 있는 상태임을 꾸준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개진한 의견에는 종종 ‘이제 좋은 남자 만나 결혼만 하면 되겠네’, ‘덕자 씨 같은 사람이 농촌 총각과 결혼해야 할텐데요.’ 같은 댓글이 달린다.
마을 관련 사업을 하고 강의도 하는 ‘봄’은 일 할 때 만큼이라도 ‘아가씨’, ‘야’ 같은 호칭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그는 이십대 중반부터 ‘네 나이가 지금 금값이다’며 후딱 팔아치워야 할 대상처럼 대하던 마을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이 크다. 요즘 이웃들은 삼십대가 다가오는 봄에게 ‘이제 애도 못 낳겠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있다.
몇 년 전 귀농한 ‘수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보통 ‘서울댁’이라고 불린다. 오히려 70세가 넘은 할머니들이 진취적으로 서로 이름을 불러, 그들에게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수수 역시 차별을 겪은 적 있다. 먼저 귀농하려고 알아본 지역에서 ‘지역 남성과 결혼해 같이 살지 않으면 받아주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수수는 결국 계획을 바꿔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을 선택해 귀농했다.
2. 내가 하는 일
봄은 마을사업이나 강의 외에도 5년동안 가족농의 일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틈틈히 마을 사업에 동참해 일하고 있지만, 동네 어르신 사이에서는 ‘대학까지 나와서 취직도 못하고 시집도 못간다’ 볼멘소리를 듣기가 일쑤다. 이렇게 농촌에서 여성의 노동은 너무 쉽게 하잘것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 봄에게는 힘든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가족 구성원 각자의 농사철학이 다르다는 것. 차라리 남이면 한 발 물러나기도 할테지만, 너무나 쉽게 이해해 줄거라는 믿음 때문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올해 고향에 돌아간 덕자 역시 부모와 함께 농사지을 때 겪는 세대차 때문에 도중에 포기한 친구들을 많이 봤다. 결국 그는 독립경영체로, 가족과는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거리를 두기로 정했다.
남편과 6년째 농사짓는 ‘덜꽃’은 남편을 비롯한 주변 남성들로부터 ‘남자는 큰 틀을 보고, 여자는 큰 틀을 못 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큰 틀을 보는 것이 더 우월하고, 남성이 가진 능력이라는 의미다.
취재에 응한 여성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남편이나 가족의 조력자로 대우받고 있음을 토로했다. 그 인식은 고스란히 농업노동에서 남녀가 받는 임금의 격차로 이어졌다.
농사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농기계도 여성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관리기는 시동걸 때 너무나 많은 힘을 필요로 하고, 예초기도 여성이 다루기엔 무게가 많이 나가 작업에 위험한 경우가 많다. 경운기나 트렉터도 키가 작은 여성에겐 농기구가 아닌 장벽처럼 다가올 때가 많다.
3. 내가 고민하는 것
“농촌은 도시보다 사생활이 잘 공개되는 공간이에요. 괜한 소문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오픈해 구설수에 오를 상황에 대비하는 편이 낫죠(수수).”
혼자 살고 싶은 덕자는 혼자 살기에 안전한 집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이웃집 남자의 추근거림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 도시에서는 신고해야 할 대상이지만, 시골에서는 문제제기 조차 쉽지 않다.
이웃들은 비혼 여성의 혼사를 걱정하지만, 여성들은 정작 ‘사생활이 개방된 농촌에서 마을 사람들 눈총에 데이트 조차 힘들다’는 것이 고충이다. 농촌에는 데이트 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이성인 친구만 만나도 온 동네에 남자친구나 결혼상대로 소문이 날 정도다. 심지어 애인이 바뀌면 동네사람 입방아에 오를까 헤어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이성과 연인 혹은 혼인 관계로 엮으려고 하는 행위, 비혼주의자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언어. 모두 그들에겐 상처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도시에서는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룸메이트로 지내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시골에서는 아니다. 이성끼리든 동성끼리든,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 아닌 다른 형태의 동거를 선택하려면 능력에서든 성적 지향에서든, 우선 주변의 편견을 이겨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4. 내가 바라는 농촌
“제가 생각하는 평등한 농촌 환경은 불편한 걸 불편하다 말 할 수 있는 곳이에요(삐삐).”
“여성이 살고 싶은 농촌이요. 젊은 여성은 희망을 갖고, 고령 여성은 존중받는 그런 곳이요(수수).”
그들은 각자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농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급격하게 바뀔 수 없는 일이지만, 자연스레 조금씩 바꿔나가고 싶다고 싶다는 의견도,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농촌은 범위가 너무 크고 마을이 너무 많아 모두 똑같다 할 수는 없지만, 요즘 어떤 마을에는 변화가 느껴지는 곳도 있다.
“우리마을엔 노인정에서 식사일을 돕는 할아버지들이 계세요. 그분들은 ‘남자도 집안일을 해야한다’ 이야기 하시기도 하죠. 아직 평등하진 않지만, 그래도 서로 잘 살기 위해 맞춰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바람이 살랑 불고 있는 것 같아요(서연).”
그녀들을 둘러싼 농촌 환경은 그들을 소외 시키며 차별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지혜롭게 이겨내 마을 구성원들과 편안하고 평등한 관계로 지내고 싶은 마음 뿐이다.
대화에 참여한 그들은 본인이 처한 차별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어떤 사람이나 농사꾼으로 성장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먹거리를 주고 싶다는 그녀, 시골에 온 만큼 꽃 피면 앞산으로 소풍을 떠나 자연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그녀, 혼자서 온전히 자립하고 싶다는 그녀는 언제쯤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중 받으며 원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녀들이 원하는 농촌은 마을 공동체가 함께 변화 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