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감밭의 독재자

자연의뜰 감나무 밭

이상적인 가족농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동안 미디어에 숱하게 소개된 행복한 감나무집, 구례 ‘자연의뜰’ 가족을 찾았다. 

감 마니아라면 꼭 다시 찾는 맛 좋은 감을 생산해 내는 김종옥, 서순덕 농부와 3년전 서울에서 귀농해 가족농에 합류하며 자연의뜰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는 아들 김상수 씨와 며느리 김은혜 씨. 이들은 가족으로도, 서로 협업하는 동료로도 완전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들이라면 가족농에 종사하는 가족 구성원이 관계를 해결하는데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제 3자의 환상일 뿐이었다. 겉보기에 행복하고 평화로운 감밭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침묵하고 마음 졸이며 유지되고 있었다.


가족의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자연의뜰 가족은 4대가 한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다. 왼쪽부터 아버지 김종욱, 손녀 김나현, 며느리 김은혜, 시할머니 오옥순, 아들 김상수, 손자 김지섭, 어머니 서순덕 씨. ©자연의뜰

“우리 가족이 잘 지내는 이유요? 서열이 확실해서예요. 남편 의견에 나, 그리고 아들, 며느리가 일사분란하게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따르니까요.”

어머니의 말처럼 이 가족은 아버지의 한 마디로 비즈니스는 물론, 가족 공동체가 움직인다. 자연의뜰 가족 중 아버지가 가진 절대 권력을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농사에 대해 탁월한 감각과 지식을 갖춘 아버지는 온 가족이 따르는 집안의 자랑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적어도 은혜 씨 부부가 귀농하기 전인 3년 전 까지는. 

당시 임신한 며느리를 위해 서울로 온갖 산해진미를 구해주던 시아버지는 은혜 씨에게 친가족보다 살가웠다. 그런 아버지만 믿고 결심한 귀농이지만 어쩐지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처럼 대하던 며느리에게 부쩍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아버지 김종욱 씨

“너희들이 그렇게 사려면 안 내려오는 것이 나는 더 좋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봐라. (서울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생각이란 걸 하며 일 해라.” 

그의 입에서는 모진 비난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가족들이 상처받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 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어머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 서순덕 씨

“(아버지가) ‘스스로 터득해라’ 이게 여기 가 있어야 하는데 이쪽에 가 있으면 ‘그것도 모르냐!’ 그러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도 일 주도는 자기가 끌고 나가야하지, 그런 상황에서 우리 아들 며느리가 거기에 대꾸도 못 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한번씩 내 속은 정말로 타들어가지만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는 거죠.”

평생 남편과 농사를 함께해 오던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매 순간 자식들을 나무라는 남편과 상처 입은 아들 부부, 특히 며느리가 마음에 쓰였다. 

“우리 아들도 성격이 급해서 며느리한테 한마디 던지는 것 볼 때 참 마음이 아프거든요. ‘내가 저러고 살았던 것 같은데, 쟤도 저러고 살면 어쩌지’ 마음에 너무 안타깝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상처받는 건 나하고 우리 며느리 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는 아버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권력자도 그리 행복하지 않은 속마음

“(한편으로는) 아버지 어깨가 많이 무겁다는 걸 느껴요, 요즘. 아, 아버지가 많이 힘드시겠다, 우리 때문에…”

한번 시범 보인 농사일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면 “노력하지 않는다”며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이지만, 며느리 은혜 씨는 자신 가족을 떠안은 가장의 부담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도 아내와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맞춰 둔 농사일에 어느 날 아들 부부가 동참하게 된 것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농사를 점점 줄여나갈 생각이었는데 농사가 오히려 더 커져가고 있으니 아무래도 힘이 들죠.”

아버지는 아들 부부가 귀농한 3년 전을 떠올렸다.

노후를 대비해 앞으로의 농사규모까지 계획해 둔 상황에서 이 농사에 동참하겠다며 찾아온 아들과 며느리가 달갑지 않았다.

낯선 사람인 기자는 물론, 가족들 앞에서도 말을 아끼는 그 였지만 모두 그가 느끼는 부담감을 알 수 있었다.

평생 ‘가장이 집안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을 강요 받으며 살았던 세대.

아들과 며느리 역시 아버지가 지나치게 부담을 갖고 스스로 자신의 짐이라 생각하며 짊어졌을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분노 속에는 혹시라도 가정과 가족 비즈니스가 무너질까 조바심 내고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것을, 이 가족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 성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장과 맞서 싸우지 않고 버티는 방법

“‘그건 이렇게 (표현)하면 좋을 텐데 이건 왜 저렇게 (말씀) 하시지?’ 그렇다고 말을 해도 솔직히 귀 담아 들으시지 않고. 그래서 저는 항상 그렇습니다. 솔직히 아무 말 안해요. 제 생각을 먼저 앞장세우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요. 다음에 제가 할 기회는 반드시 돌아오거든요. 그때는 제가 하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한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들 상수 씨는 학창시절, 아버지와 크게 마찰을 겪은 뒤 1년 동안 대화를 하지 않은 적 있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속앓이 했던 어머니 생각에 아버지와 부딪히지 않는 법을 찾았다. 

방법은 반론 하며 정면으로 대적하는 대신, 가만히 듣기.

대신 파머스마켓과 SNS 마케팅으로 판로를 개척하고, 나물을 채취해 판매하거나 초당옥수수 같은 새로운 작물을 성공적으로 키워냈다.

감 농사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최고이지만, 다른 작물에 대해서는 자신도 잘 해내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파머스마켓 나들이에 나선 은혜 씨와 딸 나현이

그래서인지 지난 2년 동안은 “노력이 없다” 타박하던 아버지도 “이제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며 아들 부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플로리스트로 활동했던 은혜 씨는 구례의 자연환경이 도시민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다가갈 지 잘 알고 있다. 그는 파머스마켓에 나갈 때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버지 나 이것(산수유 가지) 좀 조금 잘라서 팔아 볼래’ 말씀드리면 ‘저런 것 판다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다’농담 하면서도 ‘알았어 내가 그럼 꺾어다 줄게’ 그러면서 정말 고목 세 개를 잘라 가지고 오신 거예요. 화물차에 왔는데 정말 우리는 정말 산수유 나무가 온 줄 알았어요. 신기한 게 저희 어머니랑 아버지는 새로운 시도를 정말 좋아하세요.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했던 농사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저희가 일을 벌이면 타박 대신 온 가족이 그 일에 즐겁게 달라 붙어요.” 

은혜 씨의 안목은 서울 농부의 시장 ‘마르쉐@’를 비롯해 많은 장터를 찾는 소비자에게 제대로 닿았다. 같은 나무를 봐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비즈니스 성과로 보여주는 며느리 역시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은혜 씨 부부에게 농부의 시장같은 서울행은 잠시 가족농에서 벗어나 기분을 환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로 받는 스트레스는 새로운 재미있는 일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은혜 씨 부부의 정공법이다.


이 평화는 지속될 수 있는가

“주변에 가족농 하는 집 보면, 전부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갈등이에요. 주변에 집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이 정말 많아요. 나가면 어김없이 돌아오더라고요. 차라리 나가서 잘 살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저 역시 아버지가 되었기도 했고, 이렇게 돌아오게 됐으니 저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했어요.”

남편 상수 씨의 말처럼 가족농 기획을 준비하는 동안, 헬로파머에 사연이나 제보로 전해진 가족 갈등 사례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보다 가부장제가 공고한 농촌에서 모든 권력이 집중된 가장의 한 마디는 가족의 법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의 분노는 권력이 가장 약한 며느리 은혜 씨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에 정말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누구한테 풀 수도 없고, 온 식구들 하고 일에서 받는 모든 게 진짜 포화상태가 되어 갖고 ‘아, 이러다 죽지 않을까’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정작 매일 얼굴 보며 부딪혀야 하는 식구들한테는 한 마디도 할 수 없고요. 한번은 저희 집을 취재하러 온 PD가 저한테 ‘괜찮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그 분을 잡고 한참 이야기 했어요. 우리 가족을 모르는 제3자한테 털어놓고 나니까 마음이 조금 풀리더라고요. 그렇게 부드럽게 넘어가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요.”

며느리 은혜 씨가 작년 말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그의 표현대로 ‘큰 일이 하나 터질 뻔’했지만, 가족의 일상이 미디어에 소개되는 동안 자신의 가족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며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아버지도 은혜 씨 부부를 인정하며 예전에 비해 많이 너그러운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권력관계에서 일방적으로 비난을 표출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을 때 이 평화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답을 찾아 떠났던 구례.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울고 웃으며 감동받는 사이 나 역시 취재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나의 사적인 자아에도 딸과 며느리라는 역할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해 어떤 누구와 대화를 나눌 때보다 함께 공감하고 마음 아파했던 순간이었다. 

또, 고작 1박2일을 함께하며 이야기를 들은 내가 이 가족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고, 뻔한 결론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가족의 관찰기에는 결론을 열어 두기로 했다.

이 가족은 내일도 계속 일상을 살테고, 그들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은 온전한 그들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이 지금처럼 어떤 난관도 지혜롭게 해쳐 나가기를 바라며 이 가족을 열심히 응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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