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개발이 만드는 공동체를 보다, ‘에코희망여행’

이미 직업이 있는 어른이지만 장래희망은 농민이다. 그래서 농대를 나왔고, 직장생활을 하다 멘붕이 왔을 때도 치유하기 위해 농민단체로 도망가 일하기도 했다. 자연농을 빙자한 방치농이지만 열 평짜리 도시텃밭에서 6년째 농사짓고 있다. 나는 왜 마감노동자로 살면서 농민을 꿈꿀까. 나도 내 마음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내 눈에 농사는 늘 힙해 보였다. 계절마다 다른 일상을 살고 손톱보다 작은 씨앗에서 줄기가 내 키를 앞지르고 열매를 뻗어내는 모습을 매일 관찰하는 삶. 심지어 그 성장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이런 내가 주로 마감노동자로 살아온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농사를 낭만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농민의 삶은 어렵다. 농사지어 살아가는 건 너무나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덤벼볼 수 없는 삶이다. 그런데 필리핀에서 농사를 통해 공동체가 살아나고 있다니. 아보카도 때문에 갱들이 총 들고 날뛴다는 그 나라에서? 그것 말고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필리핀의 마을에서 농업을 다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사단법인 캠프’가 주관하고, 하나투어, 한국에너지공단, 하나투어문화재단이 주최한 ‘에코희망여행’에서.

이번 여행을 주관한 캠프는 필리핀 ‘타워빌(산호세델몬테시)’, ‘딸락’ 등지에서 지속가능한 마을을 만드는 국제구호 NGO다. 캠프는 도심개발과 태풍으로 강제 이주된 필리핀 주민들이 자립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다양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의료 인프라가 없는 곳에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의료와 여성들의 자립을 도운 봉제공장, 엄마가 일할 때 아이들을 돌보는 유치원… 뜻밖의 불행을 맞은 이들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것을 국가가 방기할 때 캠프가 주민들과 함께 하나하나 맨손으로 쌓아 올렸다.

그 중에서 캠프의 이철용 대표가 가장 공들여 오랜 시간을 내어 보여준 곳이 있다. 바로 농업 현장이다. 가장 강조한 것도 ‘지속할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농업이었다.

캠프는 타워빌과 딸락에서 닭이 흙을 밟고 살 수 있는 평사를 만들어 유정란을 기르고, 빈 땅에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고구마(무려 밤고구마와 꿀고구마를 모두 느낄 수 있는 품종 ‘달수’를 해남에서 공수했다.)를, 덥고 습한 나라에서 주민들이 지치지 않게 고기를 자급할 수 있도록 돼지를 기른다. 타워빌은 특히 유정란이 유명한데, 이렇게 건강하게 기른 유기농 먹거리를 주민들에게는 저렴하게 제공하고, 시내에서는 비싸게 판매한다. 시중 가격의 3~4배이지만 주문량만큼 생산하기도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 유정란으로 만든 쿠키는 필리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프니’와 전통문양을 새긴 틴케이스에 담아 마을의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좋은 수입원이 된다.

에코희망여행에 함께 참여한 김홍탁 대표는 “답이 늘 현장에 있다”고 했다. 겉으로 보면 책에서 많이 봤던 아름다운 에너지 자립마을이나 전환마을의 모습이지만, 현장에서 지내보니 그들의 고민과 노력이 어떤 건지 피부로 와 닿았다. 이론적으로는 연중 쌀농사 3, 4모작이 가능한 곳이지만 물이 없어 1모작도 겨우 한다는 이야기 역시 직접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야기다. 게다가 세계 농업의 현실은 어떠한가. 농산물을 대규모로 유통해 판매하는 구조 속에서 농업이 규모화, 단일화 되고, 농촌은 난개발로 파괴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자본을 투입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농사가 망하거나 가격을 못 받으면 농민이 파산하는 구조 속에 놓여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업을 선택한 그들의 판단은 용감하고 사려 깊었다. 많은 자본을 투입하지 않고 농사가 마을 안에서 순환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들었다. 고구마는 직접 순을 받아 개체를 점점 늘리고, 병아리를 사는 대신 알을 부화시키는 법을 배워 산란계를 직접 키워낸다. 생태계와 에너지를 착취하지 않고 자립하기 위해 건물의 위치부터 방향, 구조, 소재까지 적정기술을 이용해 농장을 만들었다. 캠프가 만들어낸 곳곳에는 ‘지금 당장’ 보다는 앞으로를 내다보며 주민들과 발맞춰 변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론적으로 자연환경이 풍족한 국가에서 자연이 인간을 도와주지 않을 때, 이 난관을 혼자 해쳐 나가려 하지 않고, 그가 누구든 기꺼이 환대하며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에코희망여행에서 만난 캠프의 자세다. 그러면서도 현지 주민을 대상화 하지 않고, 그들에게 닥친 불행을 소재화하지 않고, 함께 살며 내 문제로 만들어 풀어내고 있다. 캠프와 타워빌 주민들의 농업은 이렇게 주민들의 자급자족을 돕고 나아가 타워빌의 브랜드를 만든다. ‘먹고’ 다음의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8년을 살았다는 조부영 국장에게 왜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이곳에서 살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가 캠프 시그니처인 알록달록한 창문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냥 이런 것들이 아름답잖아요.” 많이 갖고 있어 나누는 소비가 아니라 그냥 같이 살면서 불편한 부분을 조금씩 고쳐 나가며 나아가는 삶. 빛과 바람의 방향과 물길까지 치열하게 계산해야 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 캠프가 우리에게 보여준 마음과 태도를 기억하며 앞으로는 나도 어떤 방법으로든 캠프와 ‘같이’ 해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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