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개봉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 제목이자 농촌 여성청년에게 붙는 수식어다. 영화 속 주인공은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등짝을 때릴지언정 따뜻한 밥 한 끼 먹여 보내는 이웃(정확히는 고모)과 함께 살아간다. 영화만 보고 이러한 삶을 농촌에 혼자 사는 여성의 이야기로 퉁치면 곤란하다. 주인공이 현실 농촌에서 살고 있다면 자급자족은 한가한 소리이자, 친구는 커녕 이웃이 위험하지 않으면 다행일 테니까. 실제로 농촌 여성들은 예쁘게 만들어진 영화와 자신의 현실을 빗대면 대부분 “짜증난다”는 반응을 보인다. 태풍으로 무너진 나락을 세우면서도 맑은 얼굴을 한 주인공은 여성의 꾸밈노동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고된 육체노동도 자신들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농사 지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친구와 경쟁할만큼 괜찮은 연애대상도 그저 판타지일 뿐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야할까. 농촌 여성을 둘러싼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는 작년이 되어서야 미디어에 처음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 전까지는 이들 앞에 늘 ‘예쁜’, ‘얼짱’, ‘꽃처녀’ 따위의 수식어가 붙었다. 칭찬이 의도였을지 몰라도 그 또한 차별이다. 도저히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마음과 선량한 의도로 남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람들. 김지혜 교수는 이들을 동명의 저서제목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라 부른다.
청년이 당신의 ‘친구’는 아닙니다만
한때 참여했던 팟캐스트에 공무원이 참여해 농촌 청년에 대한 지원사업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해당 사업을 집행하는 실무자인 그는 사업의 수혜 대상인 농촌 청년을 ‘우리 친구들’이라 호명했다. 팟캐스트를 발행하기 전 모니터링을 할 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우려대로 팟캐스트를 링크한 소셜미디어에는 댓글이 달렸다. “이 분은 왜 자꾸 ‘우리 친구들’이라 부르는 거죠? 청년을 어린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쁜대요.” 저자는 이러한 호명 또한 권력이라 말한다. 공무원과 성인은 청년이나 미성년자를 ‘친구’라 호명할 수 있으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 이렇게 권력이 차이가 나는 배경에서 시혜자이거나 나이가 많은 내가 수혜자이거나 나이가 어린 너를 ‘친구’로 불러주며 우리가 동등한 입장이라는 듯 선심을 쓰는 듯 하다.
나는 2년 전부터 여성의날마다 여성농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올해로 31년째를 맞이한 여성농민운동의 활동가들은 ‘00엄마’로 불리는 자신들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운동 초창기부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운동을 벌였다. 이후 스스로를 ‘여성농민’으로 호명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농민들은 누군가의 엄마나 딸, 주부로 불리고 있다. 호명되지 못하는 이름 뒤에는 농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숱한 차별이 있다. 여성농민들은 자신을 농민으로 인정해 달라며 ‘공동경영주’라는 제도를 요구했지만 이름 뿐인 공동경영주는 여성농민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가장의 이름 옆에 여성의 이름을 넣어주기는 하지만, 대출을 비롯한 모든 제도나 지원에 대해 여성농민은 경영주나 농민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눈치없는 남성들은 자신의 눈에 시골에서 큰 소리치는 여자들이 보이니 여성의 권리가 많이 올라갔다며 항변할 뿐이다.
농촌에 퍼줄 만큼 퍼줬다는 말
최근 농촌에서는 ‘농민수당’이라는 제도가 핫이슈다. 이름과 다르게 실은 농가단위로 수당을 지급하는 바람에 여성농민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사회적 합의’라는 숙제가 있다. 해남에서 전국 최초로 농민수당을 지급하기로 했을 때 내가 작성한 기사에도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그중 정중한 말을 엄선하자면 ‘그동안 농촌에 퍼줄 만큼 퍼줬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에서도 “‘농민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말은 돈을 뜯겠다는 말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이의 의견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다. 하지만 농촌에 으리으리한 창고가 하나 지어졌다고 해서 모든 농민의 사정이 좋아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동안의 지원은 규모 중심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실제로 농촌에서 작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원사업에 대해 물으면 “한 번도 받은 적 없다”, “받는 사람이 계속 받는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이는 마치 일부 여성이 장관이나 대통령이 되었으니 여권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들린다.
저자 역시 차별금지법을 일례로 다수결 제도에서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누군가는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제정이 어렵다고 말한다. 이때의 사회적 합의는 적어도 다수결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다수결 제도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차별을 다수결로 해결하려는 것이 의미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이 과연 논란 없이 제정될 수는 있는 걸까? 책에서 다루었듯이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는데 ‘논란’이 없기란 기대하기 어렵다.”
농촌과 농업의 주변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 역시 예민한 촉을 세우며 고민하지 않으면 차별하는 도시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작년 농민대회에서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지 마라’는 구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내가 사는 도시와 그들이 살아가는 농촌을 생각하면 같은 나라여도 간극이 대단하다. 양파부터 시작해 감귤까지 파뭍고, 때 아닌 가을태풍으로 벼가 쓰러지고 배추 대란이 일어난 지금의 현실에서 농민들은 과연 ‘선진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까. 이들 앞에 GDP를 들먹이며 이 나라가 선진국이라 가르치는 도시민의 말은 기만적이다.
일년에 몇번씩 전국의 농민들이 농사지은 작물과 농기계를 끌고 서울로 올라오는 이 시대에 ‘도시 사람도 힘들다’ 말하는가. 혹은 미디어에 소개되는 따뜻하고 정다운 농촌을 떠올리며 ‘그래도 농촌이 살만하지’라 생각하는가. ‘몰라도 되는’ 당신의 말과 생각. 그것이 바로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