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페미니즘에도 ‘계보’가 있다

페미니즘 운동은 단지 도시의 일로만 느껴진다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농촌에도 분명 오랜시간동안 여성들의 부당한 현실에 맞서서 싸워 온 사람들이 있다.

가부장제의 악습을 끊는 것은 물론, 생태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애정과 노력을 아껴오지 않았던 사람들.

농촌에서는 그들의 활약을 ‘여성농민운동’이라 부른다.


여성농민 조직이 탄생하다

어느 지역이든 농촌의 풍경이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던 70년대. 최초의 여성 조직은 이때 탄생했다. ‘부녀회’같은 이름의 조직이 관의 주도 아래 하향식으로 만들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관에서 조직한 여성들은 쌀을 아끼거나 저축을 하는 방식으로 정책에 순응하는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여성조직에서는 어느새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더이상 행정에 동원되는 방식이 아닌, 누구의 간섭도 없이 여성에 대한 차별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다.

그렇게 1976년가톨릭 여성농민회(가여농)이 탄생했다. 처음으로 여성이 주체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활동하기 시작한 계기다. 그녀들은 농촌사회의 봉건적 악습과 과중한 노동,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활동했다.

여성농민조직은 행정을 동참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지만, 1976년부터 주체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사진은 1980년대의 여성농민 투쟁활동.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1984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기농)이 여성농민특별회를 조직했다. 이 시기부터 ‘여성농민’과 ‘여성농민운동’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기농 여성농민위원회는 고추 제값받기를 주제로 최초의 여성농민 대회를 열고, 전북 고창의 농번기 탁아소를 설치하는 등 많은 조직활동 사례를 만들었다.

여성농민들은 소고기 수입으로 인한 ‘소몰이 시위’에도 최전선에서 전경과 맞서 싸웠다. 마을에서는 마을회관의 화투판을 덮쳐 노름을 없애는 각서를 받아내고, 대중교통이 불편한 농촌에서 버스 운행연장을 요구하기도 했다. 큰 투쟁부터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까지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운동을 개진했다.

그러나 종교 단체에서 시작한 여성농민운동은 종교라는 틀 안에서의 한계가 있었다. 한계를 인식하고, 확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꾸준히 확인한 그녀들은 1989년, ‘전국여성농민조직활성화를 위한 위원회(조활위)’를 결성해 전국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후 가여농과 기농은 여성조직의 발전을 위해 자신들의 조직을 자발적으로 해소한 뒤 조활위에 결합한다.


농촌 페미니즘의 시작,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1989년부터 활동한 조활위는 전국에 ‘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전국 단위 위원회를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1992년 전 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으로 개칭한 그녀들은 86년 우루과이라운드를 시작으로 WTO각료회의, FTA등의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와 쌀값보장을 비롯한 현실에서 발생하는 빈곤 문제에 대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여성농민의 리더십을 고취하는 지도자 교육 장면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여농은 2002년까지 조직을 세우고, 여성농민의 의식을 높이고 활동가로 양성하는 교육을 했다. 성평등교육, 협동조합 교육 등 여성농민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또, 누구의 엄마나 며느리로 불리는 여성농민의 ‘이름찾기 운동’을 벌여 여성농민이 가족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자신만의 주체성을 찾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전여농은 여성농민의 권리향상을 위한 교육과 투쟁을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여농은 1992년 여성농민대회를 열어 농촌지역에 무상급식을 확대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95년에는 가장만 농협 조합원으로 등록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농협 복수조합원제 실현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에는 여성농민 권리 보장을 위해 여성농어업인 육성법 제정에 큰 힘을 모았다.

이후 전여농은 농번기 마을 공동급식사업을 진행해 여성에게만 편중된 가사노동을 사회와 분담하며 여성농민에게 강요되는 노동과 부담에서 해방되려는 운동을 펼쳤다.

2004년에는 최초의 여성농민 국회의원인 현애자 의원이 당선됐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여성농민은 국회로 진출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제주여농에서 활동해 온 현애자 농민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여성농민이 국회의원이 된 역사를 썼다. 현 의원은 의원활동 당시 제주도 강정마을에 들어서는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며 정치인 단식 최장기록을 세웠고, 이후에는 온 몸에 쇠사슬을 감고 투쟁하기도 했다. 그는 만 6세 이하 아동부터 11종의 전염병에 대한 예방백신을 무료로 접종할 수 있게한 법을 발의하는 등 늘 낮은 곳을 향한 입법을 추진해 온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토종씨앗 잇는 여성농민

전여농은 2004년, 국제 농민 조직인 비아 깜뻬시나(La Via Campesina)의 동남동아시아 여성대표를 맡으며 생물다양성위원회와 관련한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에서 토종실태조사를 시작해 제주, 함안, 임실, 무안 횡성에서 자료집을 냈고, 여성농민 ‘1농가 1(토종)종자 지키기’ 사업을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토종씨앗 채종포에 토종 모종을 심고있는 여성농민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2008년부터는 농진청의 지원을 받아 제주에서 토종종자전시채종포 운영을 시작했다. 채종포는 2009년 농진청의 지원으로 정읍, 음성까지 확대되었다. 이후 아름다운재단, 행복중심생협과 지자체의 지원으로 전국에서 총 16개의 채종포가 운영되고 있다(2017년 12월 기준).

전여농의 토종씨앗 사업은 올해로 11년을 맞이했다. 다국적 종자회사들이 종자를 점유한 뒤로 많은 토종씨앗이 사라지는 동안, 여성농민이 주체가 되어 종자주권의 중요성을 알리고, 각 지역에서 여성농민의 종자 지키기의 거점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여성농민의 식량주권 운동

2009년에는 여성농민 생산자를 조직해  ‘언니네텃밭(당시 이름은 우리텃밭이었다)’을 만들었다. 강원도 횡성에서 ‘제철꾸러미’라는 이름으로 꾸러미 사업을 시작해 경북 상주, 안동 금소, 제주 우영 공동체를 만들었고, 현재 13개의 마을 공동체에서 여성농민이 생산자로 참여해 꾸러미를 발송하고 있다.

언니네텃밭 제철꾸러미에 들어갈 텃밭 작물을 포장하는 지역 공동체의 여성농민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언니네텃밭이 생기며, 가족농업에서의 소득을 분배받지 못했던 여성농민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했고, 자신의 수입을 얻게 됐고, 지역 여성농민들은 매주 한번씩 만나 꾸러미를 싸며 지역과 공동체 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하고 있다.

언니네텃밭은 생계를 잇기 어려운 소농에게도 꾸러미 생산자로 참여하기를 독려했다. 자신 소유의 땅이 없어 농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농민조차 꾸러미를 통해 수입을 얻게 되며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항하고 성과를 얻게 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언니네텃밭은 2016년 ‘언니네텃밭 여성농민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개칭해 제철 꾸러미는 물론, 제철 농산물 장터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언니네텃밭 생산자들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저농약 이상의 농사를 짓고 있으며, 농생태를 비롯한 다양한 생산자 교육을 진행하며 성장하고 있다.


한 손에는 투쟁을, 한 손에는 대안을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여성농민들은 올해, 남편의 동의 없이도 공동 경영주가 되는 법을 개정했다. 지금은 농민헌법 개정에 참여해 여성농민을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가정에 종속적으로 여기는 정책을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국적기업과 농정개방에 맞서 당당히 농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가족에 종속되지 않은 여성의 자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생태와 조화롭게 살기 위해 대안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들. 이것이 바로 여성농민이 만드는 농촌페미니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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