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의 한 만화방에 콘돔 자판기가 등장했다.
청소년이 가장 자주 갈 법한 곳에 설치된 그 자판기는 콘돔회사의 마케팅도, 청소년 단체의 실험도 아니었다.
바로 자판기를 사용할 청소년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속한 모임에서 설치한 것이다.
그들은 2015년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고 있는 ‘행복한 성이야기 모임 (행성)’이다.
“부모가 먼저 자녀들의 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성적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죠.”
인권이나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면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부모된 입장에서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은 일. 하지만 이 부모들은 과감했다.
그들에겐 4년간 인권과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토론으로 다져진 내공이 있었다.
성교육은 아이보다 어른부터
“성을 금기로 대하지 않고, 건강하게 바라보는 어른들이 많아져야 해요. 우리 마을의 성문화를 밝게 만드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오히려 성교육은 아이들보다 어른이 먼저 받아야죠.”
행성은 처음 마을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난 성폭력 이야기를 접하면서 ‘마을에서 아이들 성교육을 어떻게 할까’는 고민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어린아이부터 십대를 자녀로 둔 엄마들, 어린이나 청소년과 만나는 교사, 20대 청년부터 스무명 정도의 지역주민이 함께 모임을 꾸려나가고 있다.
몸에 대한 편견이나 각자 생각하는 성에 대해 토론하고, 인권을 공부하다 보니 관심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으로 이어졌다.
가족, 성별, 성에 대해 그동안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생각들이 가부장제 아래 생겨난 편견과 차별에서 나왔음을 알게됐다는 그들.
공부한 이야기는 마을 발표회를 통해 공유하기도 하고, 더 많은 공부와 토론이 필요한 주제는 공개특강을 열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최근에는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으며 미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한국 상황에 대해 함께 토론했다. 특히 지역의 남성이 함께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사이다’ 되어주는 책 읽는 공동체
고정된 성관념에 노출돼 무심코 차별과 혐오의 말을 내뱉고 상처받는 아이들, 누군가의 부인, 며느리, 엄마로만 불리는 시골살이의 답답함.
이들은 이런 일들이 생겨날 때 불편하고 그저 막막한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서로가 있다.
“이제는 ‘행성 모임에서 같이 얘기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콱 막혔던 속이 가라앉는다’ 말해요. 그리고 책을 읽으며 일상의 고민을 나누고 서로 지혜를 모으다보면, 앞으로 이렇게 헤쳐나가야겠다는 큰 힘을 얻지요. 이 모임을 통해 우리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알게 모르게 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쏟아냈지요. 입이 트이게 됐답니다. 하하.”
매주 꾸준히 모이다 보니 마을 학교와 기관과 함께 논의하고 협업할 기회도 생겼다.
작년에는 콘돔 자판기를 설치한 것 말고도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해 마을에서 영화 ‘서프러제트’를 마을에서 함께 봤다.
또, 성소수자 인권 특강을 열고 마을 중학생들과 생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보내며 ‘의외로 많은 마을 사람들이 성문화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모임의 구성원 각자는 속한 곳에서 페미니즘 관점으로 일을 기획하기도 했고, 마을 여성들의 인생사를 통해 마을 역사를 돌아보는 ‘홍동 허스토리’라는 행사를 열어 책으로 엮기도 했다.
“홍동은 농촌마을살이에서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나서고 서로 연대하며 해결하는 지역적 역사와 특징이 있어요. 저희는 여성단체도 아니지만, 마을의 학교와 여러 기관과 함께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있으니까요. 책읽기를 통해 공부하면서 마을에서도 실천하여 행동하고 싶은 것들을 같이 떠올리게 돼요.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마을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 갈 수 있고, 그런 계기를 통해 접하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있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답니다.”
곱게 키운 자식이 페미니스트 된다
“곱게 키운 딸이 남자들 수발만 들며 살지 않고, 곱게 키운 아들이 집안 전체를 책임진다는 중압감에 허덕이지 않는다.”
이것이 행성 부모들의 지론이다.
각자 스스로 인생을 선택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게 권력을 휘두르고 혐오를 쏟아내는 어른을 보며 커가는 아이들에게는 페미니즘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질문했다.
“일상 속에서 사소한 폭력과 사소한 차별에 눈 감으면, 결국 그것들이 모여 더 큰 폭력과 편견으로 자라겠죠. 페미니즘은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는 것이고, 그러한 목소리가 여성도, 남성도, 우리 마을도, 세상도 풍요롭게 성장시킬 거예요.”
행성이 추천하는
마을에서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은책 5
1. <섹스북> 권터 아멘트 | 박영률출판사
“독일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 책이에요. 우리는 모임 초기에 이 책을 읽었죠. 10대와 20대, 부모세대가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엮인 이 책을 통해 어른이 가진 성에 대한 편견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나의 성 인식부터 새로이 해야 아이들의 성교육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큰 울림을 준 책이지요.”
2. <여성학 이야기> 민가영 | 책세상
“가부장제 전반에 대한 시각을 새로이 했어요. 그동안 의심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세계, 가족, 직업, 성별차이, 가부장제 하에서 생겨난 성에 관한 통념들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마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아슬아슬한 연애 인문학> 윤희이나 | 한겨레에듀
“십대들의 실제적인 고민과 관계의 걱정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쉽고 재미나게 풀어낸 책이에요. 저자인 윤희이나 선생님을 저희 지역에 모셔서 중학생들과 학부모 를 대상으로 한 성교육 특강을 각각 가지기도 했어요. 아이들과 학부모들 모두 반응이 대단했고 호응이 높았어요.”
4. <페미니스트 모먼트>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연정, 김홍미리, 전희경 | 그린비
“한국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성운동 활동가와 학자들의 진솔한 고백과 고민이 친절하게 담긴 책이에요. 이 책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페미니즘 역사도 돌아보게 되었고, 우리의 오늘과 각자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함께 돌아보면서 감동을 나눈 것이 생각나네요. 특히 여성운동계에서 널리 알려진 분들의 용기있는 고백들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5.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 교양인
“이 책은 혼자 읽으면 정말 진도가 안 나가요. 그런데 같이 모여 읽으면 읽을수록, 서로가 의미를 더해주면서 더 재미있는 책이 되더라고요. 저자는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야기하는데, 정말 삶에서 뭔가 미스테리한 부분들이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풀리는 기분이 듭니다. 힘도 생겨나고요. 책을 읽으며 자기 자신에게 깊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내 안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도 강하게 일어났고요. 또 이 책을 읽고나면 이어서 또 다른 페미니즘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들어요.”